소설 『안나 카레니나』 의 주인공 ‘안나’는 기차에 몸을 던지기 직전 이렇게 소리친다.
“주여, 제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자살을 선택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삶의 애착이 강했던 안나는 철로에 몸을 던지고 기차가 오기 전까지 본인이 무슨 선택을 저질렀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기차에 몸이 깔리기 전까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등 불안정한 안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장면의 비극성을 고조시켰다.
나는 독자로서 안나의 불안정한 상태의 묘사를 읽으며, 자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 속에 구현해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영화화한 ‘1948년작 <안나 카레니나>’, ‘1997년작 <안나 카레니나>’, ‘2012년작 <안나 카레니나>’의 “제 모든 것을 용서”하라는 안나의 마지막 모습을 모두 돌려본 까닭이었다.
원작이 어떠한 형식이든 그것의 영화화는, 심지어 원작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간 영화라 할지라도, 늘 어느 정도는 원작의 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비판하거나 각색함으로써 2차 저작물의 미학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결코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뛰어넘지 못하겠지만, 독자의 상상에 맡긴 텍스트를 영상으로 살려낸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화는 본연의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
우리가 언젠가 봤거나, 들어본 적 있는 영화들 중 의외로 많은 작품들이 원작을 가지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원작자인 톨스토이의 후광이 너무 커 변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겠지만, 원작의 주제 또는 원작 등장인물의 성격마저 변형시켜버린 영화들도 적지 않게 있다. 나는 늘 원작의 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비판하거나 각색하는 것, 그래서 영화의 주제가 원작의 궤도에서 벗어나 버린 영화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텍스트를 영상으로 살려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화들을 소개해 보겠다.
원작 소설 속 자살 장면의 변형 - 『벌레이야기』와 <밀양>
원작 소설이 성취해 낸 문학적 성과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비판되고 소설의 영화화는 감독 개인의 해석, 비판이 개입되면서 그 세부적인 줄기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원작 소설과 그것을 구현한 영상 매체는 같은 서사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주제 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삼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소설과 영화 모두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경우로 볼 수 있다. 두 작품은 납치범에 의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소설 『벌레 이야기』는 아이를 잃은 아내가 자살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남편이 아내의 흔적을 좇는 구조라면 영화 <밀양>은 신애-소설 『벌레 이야기』 속 아내의 역할-의 옆에서 신애가 아이를 잃게 되는 과정과 그 후의 그녀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쫓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벌레 이야기』와 <밀양>은 여러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지만, 여기서는 신애라는 인물만을 언급하겠다.
『벌레 이야기』의 ‘벌레’의 의미는 절대적인 신 앞에 선 인간의 모습으로,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한낱 벌레에 불과한 인간의 실존이라 볼 수 있다. 이 소설 속 아내의 자살은 인간의 삶까지 주관하는 절대적인 신 앞에서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하나의 대결이자 결코 벌레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저항으로 해석된다. 『벌레 이야기』에서 아이를 잃은 것은 인간 존엄성이 위협당하는 부조리한 상황이며 아내는 이 부조리함에 자살로 대응함으로써 초월적인 세계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밀양>은 소설과 달리 신애가 아이를 잃게 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향하는 밀양이라는 공간은 자신을 두고 외도를 한 남편의 고향이며, 결국 아이를 잃게 되는 공간이다. 여기서 신애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기만하고, 마침내는 남편이 유산을 많이 남겨주었다는 거짓말까지 내뱉게 된다. 그러니 아이의 죽음은 신애 스스로의 위선과 기만 그리고 모순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로 빚어진 것이다.
『벌레 이야기』가 신이 내리는 재앙 앞의 벌레 같은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면 <밀양>은 마침내 신을 부정하게 되는 인간의 이야기이자, 결국에는 줄기차게 살아남아 지상에서의 실존을 주장하는 신애의 이야기이다.
- 참고문헌: "다매체시대의 문학비평 (1) : 원작소설과 각색영화의 주제해석에 관하여- 이청준「벌레이야기」 와 이창동 <밀양>." 한국문예창작 8.2 (2009): 253-280.
원작 소설 속 은폐된 죄의식의 폭로 - 『장화홍련전』과 <장화, 홍련>
『장화홍련전』의 장화와 홍련은 계모 허씨의 구박과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후 마을에 새로 부임한 부사들에게 귀신의 모습으로 찾아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이야기한다. 장화와 홍련의 모습을 본 부사들마다 숨이 넘어가고, 마을은 폐읍이 되었으나 이후 부임한 철산부사가 장화와 홍련의 억울함을 풀어주어 이들의 죽음에 이르게 한 악인을 징치할 수 있었다는 결말로 끝이 난다.
『장화홍련전』에는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특징적인 것은 후대의 이본으로 갈수록 아버지인 배좌수에 대한 형벌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계모 허씨와 장쇠가 등장하는 이본이 가장 후기의 이본으로, 초기 이본에서 배좌수가 유배에 처해지며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것과 달리 후기본의 배좌수는 면죄부를 받고, 이후 윤광호의 딸과 결혼하여 장화와 홍련을 낳아 다시 가족의 재결합을 도모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변형된다. 이러한 『장화홍련전』의 변화는 가족 내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주제에서 벗어나 점차 상징적 악인의 징치를 통해 가정의 보수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중심을 옮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정의 보수적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원작 『장화홍련전』은 계모의 희생을 전면에 내세웠다. 계모와 그 아들만을 처벌하고 나머지 등장인물은 모두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버리는 방향으로 변형된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겠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장화홍련전』의 변형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의식을 허무하게 흩어버리게 했다.
영화 <장화, 홍련>은 『장화홍련전』이 은폐하려 한 죄의식에 관한 영화이다. 작중에서 수미의 동생인 수연은 옷장에 깔려 죽게 되는데, 수미는 계모인 은주와 말다툼을 하느라 수미를 구하러 가지 못한다. 동생인 수연이 옷장에 깔려 죽는 순간에 구하러 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수미는 자신의 죄의식을 악랄한 계모인 은주에게 모두 덮어 씌운다. 수미는 수연의 죽음의 원인을 계모인 은주에게 전가함으로써 동생의 죽음에 관련된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 부분 덜 수 있었다. 환상 속의 계모를 악랄하게 만듦으로써 본처가 있음에도 계모를 들인 아버지를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계모에게만 분노를 표출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한 것이다.
수미의 아버지는 수미의 죄의식에 정신병이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스스로의 비인간적인 성욕을 은폐하고, 가정을 유지시키려 한다. 이제 그는 딸의 정신적 치료에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인내하는 자애로운 아버지를 연기함으로써 아픈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집안에 들여 아내를 자살에 이르게 만들었던 자신의 성욕을 감추고 수미의 죄의식을 정신병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처럼 영화 <장화, 홍련>은 고소설 『장화홍련전』이 감춘 죄의식과 그것이 교묘히 은폐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장화홍련전』의 또 다른 이본으로의 뛰어난 역할을 했다.
- 이정원 ( Jeong Won Lee ). "영화 <장화, 홍련>에서 여성에 대한 기억과 실제. "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0.15 (2007): 71-91. 고소설 <장화홍련전> 이본 연구 관점에서.
- 황혜진(Hwang He Jin). "공포영화에 나타난 가족서사 연구." 영화연구 0.29 (2006): 375-395.
만화 원작 속 신화와의 결합 및 변형 - <올드보이>, 그리고 『오이디푸스 대왕』
영화 <올드보이>는 어느 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오대수가 알 수 없는 곳에 납치되면서부터 시작된다. 15년 후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 오대수는 자신이 납치당했던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이제 그는 과거에 자신이 사촌인 이수아와 이우진 사이의 근친애를 목격한 뒤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으며, 이 말이 소문으로 퍼져 이수아로 하여금 자살을 선택하게 했음을 깨닫는다.
이우진은 복수를 위해 오대수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네 살이 되기를 기다린 뒤, 그를 납치하여 감금한 다음, 그의 부인을 살해하고 딸 미도를 고아로 성장시킨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오대수를 풀어주면서, 오대수와 그의 딸 미도에게 최면을 걸어 근친상간에 빠지게 한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 부탁하며 영화가 끝이 난다.
여기서 <올드보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대왕』과 그 맥락이 닿아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이 <올드보이>에서는 아버지 오대수와 딸 미도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점과, 그 결과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는 점이 오대수가 스스로 혀를 자르는 점과 일치한다.
『오이디푸스 대왕』의 비극의 시작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동성애를 범한 까닭에 펠로포스 왕의 저주를 받는 부분이다. 라이오스의 동성애에 대한 펠로포스왕의 저주로부터 비극이 기인하는 것이었듯이, 오대수가 사랑한 미도가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비극적 결말은 이우진의 근친애가 사회로부터 저주받는 순간에 이미 예정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이우진을 들여다보자. 이우진의 복수의 대상은 오대수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우진의 복수는 비루한 개인인 오대수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의 복수는 오대수의 가벼운 말에 대해 그 책임을 묻는 사적인 징벌이라기보다, 근친상간을 금기하는 사회적 담론과 그 담론이 작용하는 폭압적인 구조에 대한 저항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비루한 개인이었던 오대수의 말은 점차 사회성을 획득하면서 권력을 가지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지배 질서의 억압 기제를 수행하였던 오대수에게 내려진 15년간의 감금은 개인의 ‘말’을 빼앗은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사회성을 단절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는 미도의 성장을 기다려 오대수와 근친상간시키려는 계획보다 더 본질적인 의도로 읽을 수 있다. 근친애자로 낙인 찍혀 일시에 사회성을 박탈당하는 것이 15년의 감금보다도 더 비참한 것임을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적인 복수심을 불태운다. 결국 박찬욱 감독은 이우진으로 하여금 오대수의 혀를 자르도록 만든다.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름으로써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을 찌르는 순간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아폴론을 비난한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정죄함으로써 신의 처벌로부터도 벗어나려 한다. 오이디푸스의 신체 훼손은 회개의 의미가 아닌, 회피의 의미였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본인의 혀를 스스로 자름으로써 입을 잘못 놀린 자신을 회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최면술사에서 망각을 의뢰한다는 부분에서 오이디푸스의 회피와 닮아있다.
여기서 우진은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살하여, 근친상간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대수와 마찬가지로 우진 역시 아폴론 신의 처벌을 기다리지 않고 ‘손수’ 자신의 눈을 찌름으로써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말’을 멈추지 않았던 오이디푸스와 같은 뿌리에 있는 것이다.
- 정봉석 ( Bong Seok Jeong ). "영화 <올드보이>와 비극<미토스>의 상호텍스트성." 현대문학의 연구 0.31 (2007): 273-299.
- 송한샘(Song Han Saem). "영화 [올드보이]와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의 상동성 연구." 미디어와 공연예술연구 11.3 (2016): 65-88.
앞선 작품, <밀양>에서는 여자 주인공 신애의 자살 유무와 주변 인물의 등장 등을 통해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의 초월적이며 종교적인 세계를 현실적인 세계로 끌고 들어왔다. <장화, 홍련>의 경우 고소설 『장화홍련전』이 유교 질서를 위해 은폐해야 했던 아버지의 행동과 죄의식을 공포 영화의 특성에 맞게 기괴하게 그려냄으로써 원작을 변형했다. <올드보이>의 경우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으나, 그 안에 『오이디푸스 대왕』이라는 그리스 비극을 오대수와 이우진이라는 인물에게 적절하게 결합하여 대중성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부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동일한 외부 자극을 받더라도 개인은 서로 다른 인지적 틀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르게 지각하고, 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영화화는 해당 작품을 재구성하는 주체가 원작의 내용을 선택하고 배제한 결과물이며, 그러므로 원작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 사이의 차이점은 단순한 사고 과정의 결과가 아니다. 원작을 받아들인 한 개인의 가치관과 원작의 사건을 해석해 나가는 인지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