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1919년은 테일러 부부에게도, 우리 민족에게도 중요한 해이다. 테일러 부부에게는 아들이 태어난 해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고종이 승하하며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해이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앨버트 테일러는 미국 ‘연합통신(AP)’으로부터 고종의 국장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통신원 자격으로 고종의 국장을 취재하며 조선의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그러던 중 아들의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아내를 찾은 앨버트 테일러는 우연히 아내의 병상 침대 속에서 어떤 종이 뭉치를 발견한다. 오랜 조선 생활로 한국어에 능통한 앨버트 테일러는 이 문서가 3.1운동과 관련된 독립선언서 문서임을 알아보고 이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여 동생에게 전달한다. 동생은 구두 뒤축에 기사를 숨겨서 미국에 전달했고, 3.1운동은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독립선언서 문서가 테일러 부부가 아닌 일본 제국 주의자에게 들어갔다면 3.1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일어나지 못했거나 3.1운동에 담긴 우리 민족의 외침이 전 세계에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앨버트 테일러는 독립열사들의 재판이나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여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들은 전세계가 조선의 참담한 현실과 일제의 잔악한 모습에 주목하도록 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일제의 지위를 불리하게 만들었고, 추가적인 일제의 만행을 억제하는 효과도 불러왔다.
"When I die...."
테일러 부부에게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일제와 미국이 서로 적국이 되자, 일제는 조선에 있는 서양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의 눈엣가시였던 앨버트 테일러는 수용소에 갇히고, 메리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테일러 부부는 6개월의 억류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지만 1942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에 의해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낯선 땅에서 일궈온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는 시기였다.
1945년 일제에 의한 강점기가 끝나자, 테일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여러 노력을 기울이며 기다리던 1948년, 안타깝게도 앨버트 테일러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앨버트 테일러는 아내의 노력으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When I die, please bury me next to my father in my beloved land of Korea.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테일러 부부가 떠난 이후에 딜쿠샤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잠시 앨버트 테일러의 동생이 관리한 적도 있으나 이후 여러 과정을 통해 국가에 귀속됐다. 하지만 오랜 기간 방치되면서 많은 사람에 의해 수십 개의 방으로 쪼개지고 개조되어 불법 거주지가 되었다.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 가던 2005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이 당시의 지명과 여러 기억 조각들을 바탕으로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에게 딜쿠샤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여러 문헌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딜쿠샤의 현 위치를 찾았고, 아들은 6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