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지난건대 다시읽기]
사랑의 재현: 가시화에서 전형으로
교지 전 편집위원 전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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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건대 다시읽기]는 『건대』의 지난 호 중 다시 읽어볼 만한 양질의 기사들을 선별해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인기가 좋은 화두입니다. 왜일까요? 그건 사랑이 보통의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보편적인 사랑은, 한편 '서로 다른 방향과 강도로 피어나 세상 여러 곳에 묻어'납니다. 다양한 주체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시각매체에서 어떤 사랑은 전형이 되어 그려지지만 어떤 사랑은 가시화의 단계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이번 건빵레터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충분히 그려내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선명히 다가오는 부제목의 의미를 반추하며, 2021년 겨울 122호 <사랑의 재현: 가시화에서 전형으로>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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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서로 다른 방향과 강도로 피어나 세상 여러 곳에 묻어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내 사람을 갈망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 때문일 수도 있고 강렬한 호르몬으로 뇌에서 미화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개인마다 다른 역사로 기록되는 사랑은 우리가 곧잘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되지만 뻔한 곳에서도 존재한다. 예컨대 어느 팝가수의 유명한 노래 가사에서 사랑은 근사하지만 불편한 차를 타고 막다른 길로 빠르게 그러나 함께 내달리는 것**으로, 새하얀 드레스 위로 쏟아진 빨간색 와인이 퍼붓는 비에 씻기기를 바라는 시간***으로 묘사된다. 혹은 잠 못 이루는 어느 새벽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와 찔려오는 기억의 파편에 아파하면서도 오히려 선명한 그 자국에 안도하는 마음****으로, 유리처럼 투명하게 바라봐주는 연인으로 더 단단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으로도 그려진다.
어디서든 텔레비전과 핸드폰을 통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도 그 중 하나다. 드라마에서 이성 간의 사랑은 굵은 줄기는 물론 얇은 줄기로도 꼭 활용되는 소재이다. 시각매체를 통해 다양한 내용으로 가시화되는 그 사랑은 우리의 것과 닮아있어 보는 맛이 난다. 너무 낭만적인 관점일지 모르나 인간이 공통으로 가질 수 있는 감정이 하나 있다면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의 주체는 거의 똑같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분명 여자와 여자의,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존재함에도 말이다. 이제껏 동성 간의 사랑을 묘사한 몇 안 되는 드라마에도 아쉬운 점들은 있었다. 그래서 지난 여름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알고있지만, (연출 김가람, 극본 정원)>이 유난히 반가웠다. 보통의 사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사랑은 연인 간의 것으로 그 뜻을 한정한다.
**“Loving him is like driving a new Maserati down a dead-end street”, Talyor Swift, Red
***“You’re still all over me like a wine-stained dress I can’t wear anymore”, Taylor Swift, Clean
****“I don’t have you here with me but at least I have the memory. I tried to make it through the night but I can’t control my mind”, Ariana Grande, Thinking bout you
*****“Made of glass the way you see through me (...) I’d love to see me from your point of view”, Ariana Grande, P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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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있지만,>은 기성 드라마가 거의 묘사하지 않았던 대학생들 간 다양한 관계들을 담고 있다. 그중 ‘윤솔’과 ‘서지완’의 관계는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가 그렸던 동성 간의 사랑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솔과 지완은 사랑의 주체가 동성이라는 점이라는 것만 아니라면 너무나 진부한 서사를 쌓았다. 하지만 이성 간 묘사되던 낡은 서사는 ‘솔’과 ‘지완’으로 그 주체가 바뀌면서 역설적으로 반가운 클리셰로 다가온다. 이제껏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라기에는 다른 인물이 과도하게 끼어들었으며 지나치게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2010년, SBS에서 방영한 가족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연출 정을영, 극본 김수현)>는 ‘양태섭’과 ‘김경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동성애가 보편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공중파 주말드라마에서 주요 러브라인 중 하나로 성소수자의 사랑을 그려냈다는 것은 상당히 반가운 지점이다. 나아가 성소수자라면 눈에 띄게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일 것이라고 여겼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사랑의 주체가 화목한 가정의 장남인 내과의사 태섭과 다소 엄격한 가정의 독자인 사진작가 경수로 등장한 것은 하나의 도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성소수자일 수 있으며, 그들 역시 사랑을 통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여러 한계점이 드러났다.
드라마에서 연인 간의 갈등은 현실적이며 진지한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태섭과 경수의 경우, 다양한 요인으로 등장하는 연인 간의 갈등 중에서도 특히 가족과의 갈등만이 부각된다. 예를 들어, 극중에서 묘사된 태섭과 경수의 커다란-관계의 지속가능성까지 고민하게끔 하는-갈등은 경수의 어머니, 태섭의 가족 그리고 경수의 전부인과 얽혀있다. 오랜 시간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맞춰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갈등은 묘사되지 않는다. 태섭과 경수의 사랑에서 외부적인 걸림돌은 오직 그들의 가족뿐이지만 이러한 갈등-서사구조는 역설적으로 시청자의 초점을 태섭과 경수에게서 태섭과 가족, 경수와 가족으로 전환한다. 정리하자면, 태섭과 경수의 사랑은 사랑의 주체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주변인물의 이야기-갈등요소가 과도하게 얽혀있다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나아가 가족과의 갈등에서 태섭과 경수는 오직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취급하며 주체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그저 그들이 화가 풀리기만을 기다리며, 죄가 아닌 것에 용서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나마 태섭의 성지향성을 받아들이려는 부모마저 ‘동성을 사랑한다’는 태섭이 불쌍하다며, 태섭을 껄끄럽게 여기는 일부 가족구성원에게 ‘저 가여운 아이를 우리 아니면 누가 이해해주냐’는 식의 시혜적인 태도를 보인다. 동성애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 마냥 충격적이며 안타까운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당시-지금까지도 동성 연인이 그들의 가족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받는 부정적인 시선을 고려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전개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이 주로 공격받는 사랑,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으로만 전개된다는 점은 충분히 비판할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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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부터 10년이 더 지났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일까, <알고있지만,>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성소수자의 사랑이 보통의 사람이 하는 것임은 물론 ‘보통의 내용’을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 극중 대학생으로 등장하는 솔과 지완은 여타 대학생처럼 때론 앞일 생각하지 않고 놀기도 하지만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들의 사랑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라마는 솔과 지완이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 얽힌 감정선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다른 인물의 개입은 거의 없다. 적어도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에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솔과 지완이다. 솔과 지완의 사랑은 갈등마저도 그들만의 것이다. 외부적인 갈등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갈등은 대부분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질투라던가, 혼란스러움에서 기인한 회피 같은 형태로 그려진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성 간의 관계가 오랜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서사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솔과 지완의 경우도 같다. 오랜 친구였던 솔과 지완은 비록 서로 속도는 다르지만 일종의 사건을 기점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자각한다. 흔히 ‘썸’이라고 불리는 애매한 관계 위에 서있던 지완은 솔을 향한 마음은 확신하지만,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에 두려워한다. 혹시라도 헤어진다면, 그래서 솔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면 지완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솔과 지완은 서로에게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으로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인다.
틀에 박혔다. 이야기만 떼어놓고 본다면 결말이 예상되는 뻔한 서사 구조다. 하지만 이제껏 성소수자의 사랑은 대부분 보통의 사랑과 유다른 것으로, 극적인 것으로, 무엇보다 비실재(非實在) 혹은 무(無)의 형태로 그려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알고있지만,>에 담긴 솔과 지완의 이야기는 다소 다른 감상평을 이끌어 낸다. 주류 로맨스 서사의 틀에 섬세하게 담긴 솔과 지완의 이야기는 동성애자의 사랑도 이성애자의 사랑과 다를 것 하나 없음을, 사랑의 전형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시리즈 (연출 신원호, 극본 이우정)>, <쌈, 마이웨이 (연출 이나정 극본 임상춘)>, <역도요정 김복주 (연출 오현종, 극본 양희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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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서비스가 활성화된 지금, 우리는 어디서든 여러 나라의 드라마를 볼 수 있다. 다른 언어의, 다른 인종의, 다른 문화의 컨텐츠를 접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특히 성소수자의 사랑도 자연스럽게, 또 다양한 형태로 가시화되는 영어권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내심 그들의 인권 의식이 부럽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미국 내 시청자에게는 ‘국민드라마’, 나아가 외국의 시청자에게는 ‘인생드라마’라고 불렸던 드라마가 있다. 2009년에 방영을 시작해 11년간의 긴 여정을 마친 미국 ABC 가족시트콤 <모던 패밀리>이다. <모던 패밀리>에서는 세 가족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게이 부부 미첼과 캠도 그중 하나이다. 시즌 초기(2009년-2012년)에는 극중 배경인 캘리포니아에 동성혼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첼과 캠은 법적으로 부부는 아니지만, 그들은 <모던 패밀리>에 등장하는 여느 부부와 같이 묘사되고, 시청자들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다투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서로의 곁을 든든히 지켜준다. 나아가 이들에게는 딸도 있다. 베트남 출신의 여아를 입양하여 키우며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보편적인 경험을 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되던 해-2013년, 시즌5에서 미첼과 캠은 결혼식으로 올리며 마침내 법적으로도 부부가 된다. 시청자도 그들의 행복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물론 <모던 패밀리>가 미첼과 캠-게이 부부를 묘사하는 방식에 한계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게이를 향한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에피소드에 거북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미첼과 캠은 그저 일반적인 부부였다.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에서 게이 부부가 여타 등장인물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가시화되며, 시청자가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본받을만한 사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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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 6월 종영한 tvN 금토드라마 <마인 (연출 이나정, 극본 백미경)>의 주인공 ‘정서현’의 커밍아웃 장면에 주목하자. 이는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려낸 태섭의 커밍아웃과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먼저 서현의 커밍아웃을 상대방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서현의 태도도 넘치지 않았다. 자신의 성지향성이 그 누구한테도 사과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죄도, 안타까워할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납득’ 혹은 ‘동의’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도 그저 사람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존재에 부연설명은 필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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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있지만,>의 솔과 지완의 사랑 이야기는 한국 드라마가 충분히 동성 간의 사랑을 보통의 사랑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활동가 홀릭은 2021년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했던 화제의 드라마 <마인>의 정서현과 <술꾼도시여자들 (연출 김정식, 원작 카카오웹툰)>의 박세진을 두고 성소수자 캐릭터 그 자체가 전보다 더 많이 가시화된 것을 환영하면서도 한국 드라마가 그리는 성소수자 캐릭터의 단편성에 아쉬움을 밝혔다. 그는 과장되어 현실에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성소수자 캐릭터와 자실 혹은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성소수자의 서사를 지적했다.* 이제껏 한국 드라마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비현실적인 면만을 부각하여 그려내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캐릭터의 보편적인 서사조차 비극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가 더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다. 유독 성소수자 캐릭터에서 부각되는 비현실성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많아짐에 따라, 성소수자의 사랑에서 보편적인 서사 구조로 활용되던 비극적인 결말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드라마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하위 장르로 자리 잡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 드라마가 성소수자 캐릭터와 동성 간의 사랑을 더 풍부하게 더 다양하게 그려낼 수 있기를, 또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인> <골때녀>에서 <구경이> <스우파>까지 여성서사 약진, 일다, 2022년 1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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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자혜. (2012).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동성애 재현과 담론. 한국콘텐츠학회 논문지, 12(12), 555-566.
조서연. (2012).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타난 TV 드라마의 동성애. 한국극예술연구, 35, 365-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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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교지편집발행부 건대교지
주소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 제1 학생회관 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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