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말 우리 대학의 가을 축제인 ‘성신의예술제’가 개최됩니다. 성신의예술제는 건국대학교에서 전개된 학생 민주화 운동인 10.28 건대항쟁의 정신을 기리는 추모제에서 시작하여 예술제로 발전한 행사입니다. 여러분은 ‘10·28 건대항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이번 건빵레터에서는 『건대』가 건대항쟁을 어떻게 기록하고 담아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
|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길, ‘2024 건국대학교 성신의예술제: 誠信義路’의 현수막. |
|
|
…한편 본교의 학생운동은 ’86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투쟁위원회 체계 속에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수행해 온 과정이었던 바 이것의 최고 절정이 바로 「10·28건대항쟁」이었다.
『건대』 42호, 편집실, 「역사의 부름 앞에 답하라, 자랑스런 건대인이여! -건대학생운동사(’60~’87)」, 1989·가을
|
|
|
10·28 건대항쟁은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총 66시간 50분 동안 건국대학교에서 전개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1980년대 당시 대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전국적 대학생 조직 결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 |
|
|
『건대』 46호, 편집실, 「10·28항쟁의 현재적 의의」, 1991·가을
|
|
|
1. Q) 건대 항쟁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말씀해주세요.
A(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최동근 위원장님) 건대항쟁의 3일간의 농성은 의도된 것도, 준비된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 그런데 ‘애학투련 결성식’을 마치고 해산하려는 계획과 달리 집회가 끝나자마자 구정문, 건대부중 방면, 당시 축산대 방면 등 모든 출입구에서 무장한 경찰들이 다연발 포탄을 장착한 차를 끌고 물밀 듯 진입하더라구요. 그때 학생들은 결성식 동안 혹시 모를 경찰의 진입에 대비하기 위해 숨겨두었던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면적인 진입으로 인해 학생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당시 본관, 도서관, 학생회관, 이과대학 등으로 분산되어 몸을 피했습니다. 주변은 전경들로 포위되었으니 강제된 형태로 점거 농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건물 밖을 나가면 바로 체포될 게 뻔히 예상되니 더욱 건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경찰들은 “투항하라”는 방송을 계속해댔고 건물 상부에 계속해서 헬리콥터를 띄웠습니다. 선동 목적의 전단을 뿌리기도 했고요.
『건대』 호외호, 수습위원 우제영, 「기억하지 않아도, 기념하지 않아도 –건대항쟁인터뷰-」, 2018·겨울
|
|
|
1986년 10월 28일 전국 단위 26개 대학에서 구성된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결성식을 위해 건국대로 향했습니다. 정부를 입수한 전두환 정권은 즉각적인 공권력 투입을 결정했고, 대학생들은 예기치 못한 경찰들의 교내 진입에 의해 강제된 점거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언론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을 ‘빨갱이’, ‘불순세력’ 등으로 매도했으며, 경찰은 단단하게 무장했습니다. 이러한 외부와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학생들은 폭력 정권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의연하게 지속합니다. 하지만 10월 31일 정부는 최루탄을 이용해 비인간적인 무력 진압을 시작하고 수많은 사상자에도 멈출 줄 모르는 폭력에 학생들은 결국 투항을 결정합니다. 66시간 50분 동안 진행된 이 항쟁으로 1447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8명이 '공산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되었습니다. 역사상 단일사건으로는 최대의 연행, 구속사건입니다.
/ |
|
|
…10·28항쟁도 오늘의 역사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재평가를 통해 구국운동의 승리를 한 발 앞당겨 놓은 잊혀질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비록 10·28항쟁 그 자체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과 체계화되지 못한 사상적 결과들로 인해 많은 좌편향적 오류들이 나타났고 당시 엄청난 인적, 물적 파괴를 가져왔지만, 그러한 결과는 운동 내부의 뼈저린 자기반성과 피의 교훈으로 ’87년 6월항쟁과 계속적인 반미반파쇼 투쟁을 확고한 대중적 운동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전두환정권의 애국민주세력에 대한 초토한 작업은 ’86년 장기집권 구도에 가장 큰 장애물인 학생운동으로 이어졌고 서울대 대자보사건, 상지대 유인물사건들을 조작해 내면서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구국운동은 4·13 조치에 꺾임없이 계속적인 투쟁으로 마침내 ’87년 6월항쟁을 이끌어낸다. 식민지 모순의 총체적 해결, 전민항쟁으로서 6월항쟁, 이것이 곧 10·28항쟁이 지향했다 전국 단일 투쟁조직의 건설 작업이었던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의 힘찬 승리를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건대』 46호, 편집실, 「10·28항쟁의 현재적 의의」, 1991·가을 |
|
|
이처럼 건대항쟁은 80년대 중반 흩어졌던 투쟁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여타 민주화 운동 세력의 각성을 가져왔으며 이는 1년 뒤 87년 6·10민주항쟁의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즉 5·18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10 민주항쟁을 이어주는 다리의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1)
1) 한겨레, “66시간 50분의 건대항쟁 20주년을 맞다”, 2006-10-27.
/ |
|
|
- Q)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의 재심 청구 사업, ‘청년건대’와 ‘애학투련 건대항쟁 30주년 준비위원회’의 건대항쟁 30주년 학술심포지엄 등 건대항쟁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이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데요, 현재 건대항쟁과 관련해 진행되는 사업들에 대해서 학생들은 잘 모를 것이라 예상됩니다. 사업들의 의의를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A) 지금 30년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계승하려 하는 이유가 뭐냐 이런 식의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사실 다른 민주항쟁과 달리 아직도 건대항쟁에는 ‘공산혁명’,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어요. (…) 민주주의를 위한 뜨겁고 순수한 움직임이었지만 9시 뉴스에서 ‘건대 공산혁명분자 점거난동 사건’이라고 보도를 해 버리니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주항쟁으로서의 정당성을 되찾고자 여러 사업을 진행해온 것입니다. (…) 이렇게 건대항쟁 참여자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식들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 있게 되고, 또 건대 학생들이 자신이 속한 공간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대』 호외호, 수습위원 우제영, 「기억하지 않아도, 기념하지 않아도 –건대항쟁인터뷰-」, 2018·겨울
|
|
|
성신의예술제, 올해의 슬로건이었던 ‘그날의 불꽃, 가을 빛으로 다시’처럼 10·28 건대항쟁의 역사적 가치,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
|
|
*10·28 건대항쟁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으신 분께는 다음의 오마이뉴스 칼럼을 추천드립니다.
금준경의 <잊혀진 저항 – 10·28건대항쟁>. (2009). https://omn.kr/1q0bt |
|
|
건국대학교 「건대 」교지편집위원회kukyogi1984@naver.com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로 120 건국대학교 제1학생회관 309호 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