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건빵레터가 도착했습니다. 올해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대학 졸업생이기도 한 가수 한로로의 소설 『자몽살구클럽』입니다.
Track 1.당신! 우리가 필요합니다.
『자몽살구클럽』은 가수 한로로가 동명의 EP와 함께 낸 소설이자 굿즈입니다. 서사의 결핍을 음악이 채우고, 음악의 결핍을 서사가 채우는 방식으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한 셈이지요. 소설과 앨범이 공유하는 이 세계에는 총 네 명의 여중생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아픔을 갖고 방과후 자몽살구클럽에 가입하는데요, 클럽의 목표는 다름아닌 ‘생존’입니다.
“한 사람 당 이십 일의 자살 유예 기간이 주어질 거야.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남은 부원들이 도와줘야 해. 여름방학이 오기 전까지 네 명 모두 살아남는 게 최종 목표라 할 수 있지.”
_ p.34
주인공 소하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우연히 들어간 자몽살구클럽에서 같은 학교 선배인 태수, 유민, 보현을 만나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안는 과정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구원이라는 감각에 닿게 됩니다.
한로로 ‘시간을 달리네’ MV
Track 2.자몽과 살구의 껍질을 까먹는 일
소설은 다양한 범주의 아픔을 에피소드로 품고 있습니다. 가정폭력, 우정과 사랑의 경계, 꿈을 꺾는 현실, 청소년의 우울과 죽음 등 무엇 하나 가볍지 않은데요. 삶에 무력함을 느끼는 한 인물이 또 다른 아픔을 가진 다른 인물들을 만나 아픔을 치유한다는 흐름은 꽤나 동화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어갈수록 독자는 자연스레 인물의 삶에 편승하게 되고, 그 후부터는 그의 삶을 응원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독자의 마음을 어쩌면 가장 원치 않은 방향으로 파괴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이 꼭 이 세계의 아름다움만을 그려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각하지 못했던 일면을 드러내어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데에 의의가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소하가 끝내 아버지를 살해한 뒤 “살고 싶다”고 읊조리는 장면은 너무 문학적이라서 더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동시에 자몽살구클럽의 아이들을 마음 깊이 응원했던 독자들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평범한 오늘이 우리에게는 연명을 좌지우지하는 시한폭탄 같다는 것을 나는, 언니들은,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큼의 용기가, 연대가, 희망이, 사랑이, 내일이, 우리에게 간절한지. 이 자몽살구클럽만은 알고 있다.”
_ p.40
한로로 ‘시간을 달리네’ MV
Track 3.입춘을 기다리며
이러한 『자몽살구클럽』의 결말은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삶을 응원한다면서 이런 절망적인 결말을 내는 건 무책임하다는 반응과, 이 역시 살고 싶다는 갈망이 빚어낸 현실적인 몸부림이었다는 반응으로 갈렸는데요. 희망적이고 동화적인 설정으로 이어지던 서사가 마지막 한순간에 틀어져 버리는 것은, 사실 문학에서 드문 일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주시해야 할 점은 ‘이 소설에서의 타겟 독자’가 과연 누구였느냐입니다.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명료한 문체와 감정의 리듬으로 ‘청소년 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습니다. 그만큼 삶의 회의에 잠긴 청소년 독자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엔딩은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놓입니다. 청소년의 언어를 빌려 청소년의 고통을 말하면서도, 끝내 그들에게 삶의 끈을 쥐어주지 않은 채 이야기를 닫아버렸다는 점에서요. 작품이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었더라도,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이 아직 어린 독자들이라면 더 큰 책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절망을 보여주면서도 그 절망을 어떻게 건네느냐를 고민하는 것 역시 문학의 몫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서로를 붙잡는 일이 귀중하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연대가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요. 자몽살구클럽의 아이들이 서로에게 건넸던 마음은 결국 우리가 일상을 버티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올해 마지막 건빵레터는 이런 마음을 담으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유예와 응원이, 각자의 하루를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면서요.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추운 겨울을 잘 살아내고, 마침내 도래할 봄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