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질문이었다. 사랑은 만연한 만큼 모호하더라. 연인 간에, 가족 간에, 친구 간에, 그 어디에나 있으면서 정작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전은 ‘특히나 아끼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던데 그 설명은 내가 받은 사랑을 설명하기에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로 묻고 싶었다. 대체 사랑이 뭔가요.
소설집 <행성어 서점> 역시 이에 대한 질문으로 서문을 연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그중 <선인장 끌어안기>는 접촉 증후군을 앓는 파리하에 대한 이야기이다. 접촉 증후군이란 모든 접촉에 통증이 동반되는 병으로 파리하는 스치는 바람에도 아파했다. 이런 파리하에게 팔을 벌린 것은 그가 오래 후원해 오던 소영이었다.
‘파리하, 내가 당신을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딱 한 번만요.’
소영은 파리하가 마음으로 이룬 가족이었고, 같은 병을 함께 이겨내는 동료였으며. 파리하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죽어가는 소영의 앞에서 파리하는 사랑의 방식을 선택해야만 했다. 사라지는 순간이라도 아프지 않도록 포옹을 외면하거나, 새로운 원자가 되어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고통을 외면하거나. 선택은 우리에게 고개를 돌린다. 너라면 어떻게 할래, 뭐가 진짜 사랑이게.
누가 무엇이 맞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뭔가요, 하는 한 가지 질문에도 수많은 답이 돌아오는데. 누구는 곁에 없어도 늘 생각이 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답했다. 누구는 가진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게 사랑이라더라. 그리고 누구는 잠식되는 게 사랑이라고 했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엉엉 울다가 한 통의 연락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훅훅 치받는 뭉클거림을 한숨에 뱉어내는 것이라고도.
파리하는 소영을 사랑했다. 그래서 외면하기로 했다. 맞닿는 피부에 시트가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악을 쓰면서도 끌어안은 팔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파리하의 선택은 고통을 견디는 것이었지만 본연의 사랑은 고통을 견디거나 고통을 주지 않거나 하는 차원 이상일지도 모른다.
파리하의 집에는 움직이는 벽과 몸에 닿지 않는 옷이 있었다. 땅에 발 한 번 닿는 게 아파서 늘 비접촉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바람마저 고통스러운 파리하에게 아이와의 포옹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심은 얼마나 큰 마음일까. 파리하의 사랑은 당장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 이전, 막연한 공포를 이겨내고 끌어안기를 선택한 것에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고통을 자처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끝이 존재한다. 단순히 상대가 나의 명명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이 세계를 떠나 새로운 원자가 될 수도 있다. 관계하는 이상 우리는 결국 영영 슬프게 될 것이다. 그걸 전부 알면서도 우리는 간혹 누군가의 손을 잡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다. 파리하가 선택한 것처럼. 그것은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보다 덜한 마음은 아닐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