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장 조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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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V 연속극이 끝나거나 기업이 망해서 서비스가 종료될 때 상투적으로 쓰이는 표현을 대한민국이 망했다는 자조적 표현으로 익살스럽게 비튼 말이다. 주로 경제 위기를 다룬 기사나 커뮤니티의 댓글에서 보인다. 이 농담은 사람들을 피식거리게 하지만, 어쩐지 농담으로만 끝날 것 같지 않은 서늘한 현실에 결국 그 끝은 쓴웃음으로 바뀌게 된다.
세계의 주요 경제기구들은 한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낮추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으로 최고조에 달한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를 낳고, 물가 상승을 자극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오히려 가계와 기업의 레버리지 위험만 가중되었다. 전방위적인 유동성 경색*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 부채비율은 올해 비기축통화국 평균을 넘어서고, 그 격차가 지속해서 벌어질 전망이다. 합계 출산율은 0.7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연금은 30년 뒤에 고갈될 전망이다. 모든 부문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정말로 대한민국은 망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위기는 한국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염병 시기 동안 세계는 시중에 막대한 현금을 풀었고, 전쟁으로 공급 비용이 상승하면서 전 지구적인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다. 각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강도의 긴축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한 반작용을 온 세계가 겪고 있다. 요컨대 지정학적이고 글로벌 거시경제적 요인이 한국과 전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현금이 줄어드는 현상을 말함. 물가 인상을 완화하기 위해선 유동성을 옥죌 필요가 있지만, 즉 시중의 현금 유통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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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우리나라는 30년간 전례 없는 성장을 이루어 세계 5위*의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지위에 걸맞지 못하게 아직도 세계를 바라보는 수준은 엄마냐 아빠냐 하는 유아적 사고에 머물러있다. 몸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그 덩치에 맞지 못하게 “친미냐, 친중이냐”하는 1차원적 논쟁에 빠져있다.
세계는 실로 지정학의 시대로 접어들어 대격변을 맞고 있다. 탈냉전 이후 30년 이상 유지되던 자유무역주의와 국가 분업체계가 무너지고, 세계는 블록화되어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보호주의가 도래했다. ‘아시아의 4마리의 용*’이라며 우리나라를 어화둥둥 띄어주고, ‘안미경중*’의 우산 아래서 성실히 일만 하면 성장할 수 있던 꽃같은 시절은 다 가버렸다.
이젠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이익을 좇아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인 국제정치관은, 정책결정자들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관료들 또한 주도적인 외교의 틀을 짜지 못하고, 터진 구멍에 허둥지둥 손가락만을 집어넣을 뿐이다. 언론도 같은 장단에 맞춰 춤추고 있다. 국제정치는 결코 이분법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특정 정권이 특정한 국제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반미(反美)’라고 알려진 노무현 정부는 FTA와 이라크 파병을 추진했고, ‘친일(親日)’로 알려진 이명박 정부는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반발을 샀다. ‘반중(反中)’으로 알려진 박근혜 정부는 시진핑의 천안문 열병식에 참여했고, 당시 새누리당의 TK계 의원은 사드 배치를 격렬히 반대했다. ‘친중반일(親中反日)’로 알려진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사드 반입을 시도했고, 일본과의 회담을 성사하기 위해 애썼다. ‘친미반중(親美反中)’이라고 알려진 윤석열 정부는 대만을 방문하고 온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패싱했다. 국가의 외교를 친親○반反○으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민총생산, GNI 기준. GDP 기준으로는 세계 10위
*1980년대 이후 일본을 제외한 4개의 동아시아의 신흥 산업국을 지칭하는 말. 한국 외에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있음. 에즈라 보걸 하버드 교수에 의해 제안됨.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우리나라의 산업화 이후(중국과 수교 이후) 정치경제적 전략을 표현한 학술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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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틴이 나쁜 놈이면, 전쟁은 끝나는가?
이분법적 국제정치관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국제정세의 파악을 어렵게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모든 다른 전쟁이 그러하듯) 매우 복잡한 원인과 양상을 가지고 있다. 나토의 동진에 대한 러시아의 위기감, 우크라이나 내의 친러 분리세력과의 갈등과 크림반도 병합의 악몽, 미국의 셰일가스 수출 확대 의도와 바이든의 지지율 하락, 푸틴의 호전적 성향과 젤렌스키의 포퓰리즘적 성향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발생한 참사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푸틴을 단순히 악마로 만들어 놀랍도록 이를 단순화했다. 푸틴이 나쁜 놈이면, 전쟁은 끝나는가?
푸틴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히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 전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게 할 뿐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다. 세계가 탈냉전 이후 유지해온 국제분업체계가 무너졌고, 전 세계가 서방과 친서방으로 분리되어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블록화’ 현상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친구(우호국)’끼리만 무역을 하게 되는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이 탄생한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유럽과 미국, 한·일이 서로 우위를 가진 첨단 기술을 공급하면, 중국과 동남아, 남미가 값싼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고, 러시아와 중동이 저렴한 원자재를 공급해왔다. 그러한 분업체계가 망가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제 각국은 비싼 자원으로 비싼 노동자를 고용하여 비싼 곳에서, 자체의 기술력으로 생산해야 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과 소비자가 나눠 갖게 된다. 이 전쟁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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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우리... 친구 맞나?
미국은 러-우 전쟁을 지렛대 삼아 사실상 프렌드 쇼어링 체계를 가속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의 셰일가스를 가지고 러시아의 천연가스(PNG)와 경쟁을 해왔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 가스 수출을 제재하고 유럽과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의 프렌드 쇼어링은 실로 노골적이다. 바이든은 IPEF(인도태평양프레임워크)와 Chip4 동맹(반도체) 등을 출범하여 한국을 포함한 우호국들과 연대를 도모함과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 등 반서방 국가를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프렌드 쇼어링은 동맹국을 위한다는 점에서 일견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프렌드 쇼어링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자국 우선주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IPEF와 Chip4 동맹 모두 결국에는 북미 내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인도는 이미 IPEF 탈퇴를 선언했고, 삼성전자와 TSMC는 Chip4 참여를 꺼리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의 이익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IRA(Inflation Reduction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 법안이다. 올해 8월에 기습적으로 발표된 이 법안은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한화 약 1000만 원의 지원금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요컨대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미국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장사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현대차의 조지아 공장은 2025년에 완공될 예정이고, 내년부터 시행될 이 법안으로 인해 현대차의 북미 시장점유율은 2년간 초토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IRA 법안은 동맹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반시장주의적 조치이다. 한미 FTA 협정과 WTO 협정에도 어긋나며 자유무역주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한다. 하지만 미국을 비난하기 어렵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틴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의 기본적인 룰이다.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는 법과 도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를 가정한다.
이 비극의 책임은 순진하게도 미국이 공정한 게임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 우리나라에 있다. IRA의 전신인 BBB(Build Back Better, 더 나은 재건) 법안이 공개되었을 때 도요타와 일본 정부가 치열한 로비전을 통해 IRA에서의 불이익을 제거한 것과 대비된다. IRA가 물밑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미국 펠로시 하원의장이 방문했고, 그때 윤석열 대통령은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린 친구 아니었냐며 볼멘소리로 외쳐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IRA 법안은 미국도 결국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외교력을 십분 발휘하여 IRA 법안을 바로잡고, 동맹국(한국)의 이익 침해에 대해서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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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바닥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영화 『타짜』의 평강장의 대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영국 프린스턴 경의 말을 인용한 것이 원조이다. 그의 말대로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프렌드 쇼어링이 허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실제로 미국은 러시아의 달러 결제를 제재해 국채 변제를 막았지만, 월가는 급락한 러시아 채권을 대거 사들여서 엄청난 이익을 냈다. 또 ‘미국이 대체할 수 있는’ 러시아 천연자원은 제재했지만, 러시아산 알루미늄과 니켈 등의 수입은 오히려 늘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있지만, 사실 전략 물자를 제외한 일반 소매품의 무역 규모는 오히려 늘었다.
프렌드 쇼어링은 전략적인 기술과 자원 경쟁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비경쟁적인 부문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분업체계를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와 전기차, AI 기술 등에서는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지만, 서로를 절대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프렌드 쇼어링의 허와 실을 분명히 인식하여 한국의 이익 극대화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해야 한다. 어떤 국가와 어깨동무를 하거나, 어떤 국가와 척지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략적으로 동맹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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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이 말은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열세였던 빌 클린턴은 이 캐치프레이즈 하나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고픈 미국 시민들의 열망을 잘 담아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만큼은 ‘정치’가 가장 문제가 된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중국과 러시아와 싸우는 이유도 국민이 원하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는 이유도 국민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분법적 국제정치의 망령은 아직도 한국에 떠돌고 있다. 게다가 기성 정치인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이를 이용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불법 선거자금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뜬금없이 한미일 연합훈련 때문에 욱일기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다는 선동을 시도했다.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 반등을 위해 뜬금없이 전술핵 배치 카드를 꺼냈다. 이들의 의도대로 이것은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고,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평화를 위한 청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정책은 국민의 의중에 구속되기 때문에 결국에 중요한 것은 국민이다. 정책결정자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외교 정책을 수립하고, 단기적인 이슈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이분법적 국제정치관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정치인들 또한 국민의 국가적 혐오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격변하는 지정학의 시대에서 외교에서만큼은 정쟁을 멈추고 국민과 관료, 여당과 야당이 함께 손잡고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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