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건대 다시읽기]는 『건대』의 지난 호 중 다시 읽어볼 만한 양질의 기사들을 선별해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OO 치고 ~하다.’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셨던 적 있나요? 말이 만들어내는 어떤 울타리에 갇혀 보신 적 있나요? 이렇게 만들어진 울타리는 너무 쉽게 세계를 양분하고는 합니다.
지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회, 우열을 지우고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를 촉구하는 이번 건빵레터는 2018년 봄 114호의 <장애인에겐 단 하나의 모양이 있다고요?>입니다. 울타리를 허물고 ‘우리’의 범주를 부단히 넓히는 사회가 되기를 염원하며 발송합니다.
너 장애인 치고 너무 예쁘다!
오후 세 시. 나른한 오후 수업을 들으며 식곤증을 참고 있을 시각, 뜬금없는 박수소리가 나의 잠을 달아나게 했다. 개인 발표가 끝난 뒤 한 장애인 학생이 ‘대단하다’라는 교수님의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요구했고, 학생들은 고무되어 손뼉을 쳤다. 필자도 얼떨결에 동참했으나, 다시금 곱씹어보니 그 학생의 발표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학생들의 발표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더 많았다.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필자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 때문이다. 우리 반에는 희귀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탓에 그 학생은 소위 ‘정상’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김새를 가졌었다. 그 학생에게 한 비장애인 아이가 던졌던 말이 있다. “너 장애인 치고 너무 예쁘다!”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 장애인 ‘치고’ 너무 예쁘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게 어떠한 모양을 부여하고 있다. 장애인 마크만 보아도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양뿐이다. 장애에도 분명 다양한 종류가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장애인에게 왜 ‘특정하고 특별한’ 모양을 부여하는 것일까.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개인이나 집단을 소외시키기 위한 가장 편리하고 강력한 도구는 타자화다.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그들’로 칭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도움과 배려를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도움 받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을 불편하고 불행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문제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남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상부상조가 일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도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도움’ 자체를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힘이 약한 A가 무거운 짐을 들기 위해 끙끙 대고 있다고 치자. A의 짐을 같이 들어준다고 해서 A는 타자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면 ‘불쌍한 사람’으로 타자화 되는 것이다. 나아가 타자화를 하는 주체인 비장애인들 또한 ‘불쌍하지 않고 우등한 존재’로 타자화 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도와주는 우등한 비장애인’과 ‘도움 받아야 하는 열등한 장애인’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를 생성하며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은 ‘그들’일 뿐이고 비장애인만이 ‘우리’가 된다. 이 지점에서 비장애인들은 본인이 우월하다는 착각에 도취하게 되고, 이는 이분법적인 사회를 계속해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장애인의 의사는 배제된 채.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장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가엾다는 연민과 대단하다는 찬사, 두 갈래로 분류된다. 그러나 대단하다는 찬사에도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부가설명은 당연하게 녹아있다. 대단하는 찬사 또한 연민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설사 그 의도가 선한 것이라고 해도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불쌍한 사람을 달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보고 ‘장애우’라고 말할 수 있으나 장애인끼리는 서로를 ‘장애우’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헤릴린 루소의 자서전인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에서 그녀는 말한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아무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더니, 휴식 시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한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당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내 삶에 눈물을 흘릴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다. 나를 보고 저렇게 눈물을 질질 짜는 사람들을 자꾸 마주친다는 것 빼고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대놓고 적대적으로 구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보다 화가 난다. 질질 짜는 사람들을 보면 뒷통수를 퍽 때려주고 싶지만 진짜로 그럴 수는 없고,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헤릴린 루소는 장애/여성인권운동가이며 뇌성마비 장애 여성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이 비장애인 주류 사회에서 당하는 타자화를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가장 눈에 띄었던 내용은 비장애인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인권 운동가를 장애인이 수행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다수의 단체에서 의도치 않게 귀감이 되었고, 그것이 못마땅했다는 것이다. 대단하다는 반응에 대해 그녀가 ‘뒷통수를 퍽 때려주고 싶어’했던 이유는 그것이 ‘장애인은 결함을 가진 특별한(혹은 잘못된) 존재’라는 타자화에 근원을 두기 때문이다. ‘장애는 불행하며 남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비장애인들의 고정적인 인식이 비장애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차별 없는 사회를 갈구하는 비장애인이라면 장애인에 대한 고정적인 인식을 지워야 한다. 모든 장애인이 힘들고 불행하다는 것을 누가 아는가?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행복한가? 장애인은 신체적 ‘다름’ 안에 머물러 행복해지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다. ‘잘못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고정적인 인식일 뿐 실상은 다를 수도 있다. 장애인이라는 단어 앞에 당연하다는 듯 놓여 있는 ‘도와주어야 하는/불쌍한/의존적인/불행한’이라는 형용사는 비장애인들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기준 혹은 착각일 뿐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입장을 결정지을 수 없다. 즉, 장애인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장애인의 행불행을 결정지을 수 없다. 다름을 결함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 이곳이 타자화가 사라지는 시작점이 된다.
"장애를 인정하기 꺼렸던 주된 이유가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에 대한 내 태도에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 태도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 헤릴린 루소
또한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타자화 논리에서 오랫동안 대상의 자리에 머물렀으므로 스스로조차 본인의 장애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헤릴린 루소가 ‘대단하다’는 평을 받는 것은 본인의 장애정체성을 인정하고, 장애를 탓하기보다 장애인을 타자화 하는 사회를 비판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왜 대단해야만 하는가? 언제부터 장애인 당사자마저 장애를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장애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대단해졌을까. 이는 ‘차별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비장애인 주류 사회’의 분명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당연하다는 듯 부여하고 있는 모양들을 지워야한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이유로 그들을 이질적인 타자로 규정한다. 날선 편견 속에서 어린 장애인들은 ‘너는 정상이야’라는 말을 듣기 위해 장애정체성을 숨기려 고군분투 한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 또한 비장애인들의 오만과 편견이다. 정상인들은 장애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등한가? 그 날 오후 세 시, 장애인 학우가 타인의 귀감이 되기를 ‘강요’ 당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위화감이 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 ( ) 예쁘다!
A는 수줍음이 많은 애, B는 활발한 애, C는 일을 잘하는 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인만큼 수많은 카테고리가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것이며, 이 카테고리들이 모여 한 사람을 이루는 모양이 된다.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왜 ‘열등한 존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만 부여하는가.
장애인은 특별하지 않다. 때문에 한 장애인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했다는 사실에 감동하여 박수를 쳐야할 필요가 없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이전에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도움을 줌과 받음에 선택권이 있는 하나의 사회 구성원이다. 장애인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비장애인과 다를 뿐이지 결함이나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쓸데없는 연민이나 찬사는 영영 접어두어도 좋다. 또한 장애인을 이질적인 타자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 중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며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해주는 것이 옳다. 자신도 모르게 ‘대단하다’고 말하며 장애인에게 연민과 동정 어린 시선을 당연시 하는 비장애인들은 본인의 행동을 자각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면,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을 칭송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장애인들과 경쟁했을 때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인 제도부터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장애인들이 일을 처리할 때 ‘열등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장애인과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세상이다. 장애인 타자화가 사라질 때 사회는 ‘장애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장애인에게도 각각의 모양이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