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역하고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A. 해군 전역 후에 바로 바다에서 선장 일을 했다. 바다 생활을 연장해서 하다 보니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제2연평해전 당시 트라우마가 겹쳐서 바다 생활을 접게 됐다. 지금은 제대군인 지원센터에서 연계해준 대기업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Q.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사전 징후가 있었나요?
A. 며칠 전에 첩보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다. 첩보를 받은 상부의 지시로 탐색을 하던 중에 6월 29일 공격을 받은 것이다.
Q. 조심스럽지만 교전 당시 탑승하고 계셨던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A. 당시에 꽃게잡이 철이라서 어선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북방한계선 이전에 [1]어로한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임무는 어선들이 어로한계선을 넘지 않게 통제하고 어선들을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 6월 29일 9시쯤에 “총원! 실전 전투배치!”라는 신호와 함께 출동 임무가 하달됐다. 출동했지만 북방한계선을 넘은 북한 경비정에 선제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당시 교전수칙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공격하지 못하고 차단기동을 하고 있던 상황이다. 편대 선두로 참수리 고속정 358정이 나섰고 우리 357정은 뒤따라가면서 선회하던 도중, 북한 경비정이 우리 357정을 향해 모든 포를 겨누고 있는 것을 식별했다. 공격징후를 관찰했지만, 교전수칙에 따라 선제공격 하지 못했다. 결국 방어 태세만 갖춘 상태에서 북한군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격 받은 우리 357정이 대응 사격을 하면서 약 30분간 치열한 교전이 시작됐다.
Q. 전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군인으로서 말하기 어려웠던)
A. 해전을 치른 지 45일 후에 고속정을 인양했는데, 내부에 펄(해저 진흙)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해전으로 인한 부상과 트라우마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속정 내부에 있는 펄을 치우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불만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고속정 내부를 청소하는 과정에서 썩은 펄이 피부에 닿아 피부병이 생겼다.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컸다. 병원에서 돌아와 처음 참수리에 들어갔을 때 해전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상당히 힘들었다.
Q. 안보교육관을 하게 된 계기와 안보교육관으로서 진행한 활동은 무엇이 있나요?
A. 2002년에 예비군 교육대에 있으면서 예비군들이 해군 소속임에도 제2연평해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정부에서 당시 상황을 숨기려고만 하고 여러 다른 이슈에 묻혀 해전이 잊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강의를 다니며 제2연평해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안보 의식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Q. 제2연평해전 생존자 전우회의 활동
A. 유가족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2002년도에 내가 최고 연장자로서 전우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유가족분들과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가족 입장에서 자기 가족은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는데 우리는 살아 돌아왔으니까…그 마음은 백번 천번 이해한다. 이런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모이면 자주 식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을 하다 보니까 유가족분들도 이제 마음을 열어 주시고 자기 자식같이 보듬어줬다. 이렇게 유가족과의 관계 형성과 더불어 전우들 간에 교류도 원활히 하고 있다. 전우들이 슬픈 일이 있을 때는 힘이 되어주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전우를 더욱 빛내 주는 그런 교류를 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가 나이가 많이 들어도 전우회만큼은 유지하고 싶다. 우리 후세대에 전우회를 넘겨주면서 이끌어가게 하고, 제2연평해전과 전사자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게끔 할 것이다.
Q. ‘연평해전’영화를 보고 느낀 점 혹은 변화된 점
A. 영화를 관람했을 때의 그 심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배에 함께 탄 전우가 내 앞에서 전사하고 다치는 상황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고,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또 발생한다면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당한 것에 몇백 배 응징했으면 한다.
Q. 서해가 ‘평화의 바다’가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A. 북한이 계속 미사일을 쏘고 도발하는 등 정전협정이 잘 이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정전협정만 믿지 말고 철저한 도발 억제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인데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국방력의 상당 부분이 육군 전력에만 쏠려 있다. 전쟁을 억제하려면 해군력, 공군력을 더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Q.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에 전운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해전을 겪은 당사자로서 전쟁의 잔혹성에 대해 생각이 많으실 텐데 이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현재 푸틴이라는 사람이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선량한 시민이 죽어 나가고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고 있다. 전쟁이 가장 잔혹한 점은 남아있는 구성원 모두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식을 잃은 유가족의 마음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평생 불행 속에서 살아간다. 전쟁은 정말 잔혹한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제적인 압력을 통해서 더 이상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Q. 건국대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
A. 인터넷으로도 제2연평해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렇게 전쟁을 겪은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를 느끼는 것은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건국대학교 학생들이 대한민국이 처해있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느꼈으면 한다. 이제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대한민국에 인공기(북한의 국기)가 올라가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북한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국방력과 경제를 키우고 나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국민 개인으로서 애국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애국의 기본은 우리의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태극기는 우리의 존엄성을 나타내고, 태극기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태극기를 사랑하고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하는 것이 바로 애국이 아닐까 생각한다.
[1] 고기나 수산물 따위를 잡거나 거두어들일 때, 일정 지역이나 구역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범위가 되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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