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의 건빵레터는 <서평: 이태원 참사 1주기에 『재난을 묻다』>입니다. 필자는 사회적 재난은 '혼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함께 바꿔나가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책 『재난을 묻다』를 추천합니다. 연대가 어려워진 데다 '인재의 원인은 끊임없이 반복되고자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왜 연대해야 하는지 알게 된 후에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요?
이번 레터와, 레터 하단에 첨부된 『건대』 125호의 기사는 이에 답하고 있습니다. 촘촘히 읽어주세요.
“세월호 이후는 달라야 한다” 다시 되짚어보는 일곱 건의 재난참사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진 참사작가기록단은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펴낸 뒤, 이와 같은 재난참사가 반복되는 현재의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가 생각했다. 그리고 세월호 이외에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 이행,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수많은 재난참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우리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있는 재난참사 일곱 건을 다시 꺼내왔다.
『재난을 묻다』는 저자 참사작가기록단이 통해 피해자와 유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맥락이 왜곡되거나 축소되어 알려진 해당 사건의 전말과 처리 과정을 재구성한 책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참사가 되고, 또 다른 참사로 이어지게 된 구조적 원인을 밝혀내고자 했다. 재난참사를 둘러싼 문제점은 우리 사회 거의 모든 영역과 맞닿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재난참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기록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구조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가는 일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 소개글 – 교보문고 제공)
큰 아픔을 직면하는 게 무섭다. 하지만 『재난을 묻다』를 읽으면서 혼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함께 바꿔나가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사회적 재난임을 알게 되었다. 돈, 안전불감, 하청 등 인재의 원인은 끊임없이 반복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생존자와 유가족은 같은 일로 또 인명피해가 없도록,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도록 싸우며 희생자들을 기억한다.
국가의 책무를 대신하는 유가족들의 연대를 산산히 흩어지게 하려는 수단으로는 보상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봉건시대에는 영주가 노예의 생존권을 쥐고 좌우하다가, 노비가 죽었을 때도 귀족은 생존권을 갖고 있기에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재도 수익 때문에 노동자들을 열악한 작업 환경에 내몰고, 희생된 후에도 보상금으로 무마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백 년 전으로부터 얼마나 나아 온 것일까? 작업 환경에 따른 탄력적인 생산력 조절이 불가능하고, 언제나 예외 없이 생산량이 증대되어야 하는 금융 시장의 영향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보다 많은 사회적 살인에 방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학생사회가 탈/반정치화한 것은 진정으로 대다수의 사회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인가, 아님 경쟁적 교육이 각자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인가.
분명한 것은 연대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돈이 야기한 죽음조차 돈으로 덮고자 하는 세상 속에서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대책 마련을 위해 연대한다. 우리는 많은 부분 국가가 아닌 이들의 노력을 통해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그렇기에 당사자성이 부재하더라도 연대할 책무가 있다.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두가 태어났기에 한 번씩 삶을 충분히 경험하고, 늙고, 병들더라도 온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의 최소한의 도리이자, 최고의 예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족 연대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더욱 요구된다고 느낀다. 모든 죽음은 같지 않다. 모두의 호상을 위해서도 각별히 애도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죽음들이 있다. 당신은 애도하고 있는가? 애도는 혼자 감내해야 할 아픔도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기 위한 추모이다. 이를 통해 죽은 자는 숨 쉬는 이들 곁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언제든 다시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