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성장과 함께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민주주의를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칭할 수 있을까요? 개강을 맞아 발간을 재개한 올해 첫 건빵레터에서는 우리나라 정치와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짚어보며, 건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우리의 역할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나타나는 것보다는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이성적일 것이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 찰스 하그로브(Charles Hargrove)가 1951년 한국 전쟁의 참화를 보고 쓴 기사의 일부이다. 이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지금 국내외에서 많은 이들은 한국이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를 피워냈다며 한국에 자리 잡은 민주주의를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고 정말 꽃을 피워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소 원론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행정부의 수반 혹은 의회 의원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방식에 그친다면,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정치를 신뢰하고 있는가?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정치 뉴스는 양당의 갈등과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이에 피로감을 느끼는 시민들은 정치 무관심, 더 나아가 정치 혐오를 느끼며 눈과 귀를 닫는다.
최근 있었던 제22대 총선 기간 동안의 정치 뉴스를 살펴보면 대통령 내외 혹은 야당 대표에 대한 의혹과 관련된 이슈가 지배적이었다. 여야 모두 상대 진영 수장의 각종 언행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선거의 주요 쟁점은 대통령 혹은 야당 대표에 대한 심판론이 대부분이었다. 중앙당에서는 이러한 심판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각각의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는 이에 더해 지역 개발 공약을 남발하며 표를 호소했다. 중앙의 심판론과 지역의 개발 이슈 속에서 국가적 입법 과제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예컨대 고령화 및 저출산 문제와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입법 과제들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 개개인의 결함에 대한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 논쟁에 정책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 구성한 입법 기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입법 활동을 하며 정부를 감시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정치권의 담론이 과연 국민의 여론을 반영한 것인지 의문이며, 300석 중 254석이라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는 대부분 유권자의 표심을 얻고자 지역 개발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지역 개발은 엄연히 각 지방자치단체의 업무이며,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서 다루어야 할 사안이다. 물론 지역구 국회의원이 지역의 여론을 국회에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 개발이 국회의원의 주업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보다 넓은 차원의 국가적 입법 과제를 다루어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 더 나아가 정치권에서 정책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 비판이 양비론에 그쳐 정치 무관심과 혐오로 결론 맺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의 논리를 떠나 국가적으로 필요한 입법 과제의 추진을 촉구하는 시민단체는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며, 몇몇 정치인들은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정책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이에 유권자는 언론에 보도되는 소모적 논쟁에 매몰되지 않고 각 정당의 정책적 방향성을 보고 표를 던짐으로써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선출된 이들에 대해 선거 이후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 결국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유권자가 입법 과제 추진에 관심을 가진다면 정치도 여론의 경향에 맞춰 움직일 것이다.
5월 30일, 우리가 선출한 제22대 국회가 개원한다. 4월 10일 선거가 끝난 후,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선거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선거를 통해 정부에 대한 심판 여론을 전달했다면, 이후 정부는 어떻게 변화하며 야당은 민의를 대변하는 입법 활동을 잘 하는지 계속 지켜보며 비판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을 대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 세대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의 싹은 틔웠지만, 그 꽃은 앞으로 우리가 피워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