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사람들은 슬픔을 느낄 때마다 회피하고 억지로 극복해내어 기쁨을 느끼려고 한다. 하지만 슬픔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기에 서둘러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기쁨 옆에는 슬픔이 있는 것이 당연한 삶의 이치이다. 억지로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서 해소해야 하며 슬픔을 안고 갈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슬픔이 있기에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처럼. 라일리를 둘러싼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라일리가 슬픔을 느끼기에 당연하다. 하지만 기쁨이는 슬픈 기억들마저 제어하려고 하였고 감정을 억눌렀다. 그런 나머지 슬픔이 제어되지 않다가 슬픔을 인정하고 나서야 사건이 해결되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잃은 기억, 누군가가 떠나간 기억, 부끄러운 기억, 지독하게 슬픈 기억…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 기억들을 억지로 잊기 위해 노력한다. 더 이상 머릿속에 슬픈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싫어서. 이젠 그만 시달리고 싶어서. 하지만 그런다고 잊히지는 않는다. 감정을 잊으려는 행동은 그것을 부정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고 외면할수록 슬픔의 부피는 점점 커진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행복해진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움없이 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정한 자기 자신은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슬픔을 대하는 것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벗어날 수 없다. 그중 가장 감당하기 벅찬 감정은 애(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은 감정들 중 나약함과 무기력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도 인간다운 감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마주할 줄 알아야 비로소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슬픔에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슬픔을 두려워하다
그렇다면 왜 슬픔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까? 먼저 슬픔에는 성찰이 뒤따른다. 고립, 상실, 상처 등 슬픔을 느끼는 상황 뒤에 우리는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자신의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문제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정말 맞는지 등을 돌이켜보며 감정적이었던 사고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슬픔을 외면하고 마주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때로는 감정이 슬픔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분노의 감정으로 갈 수 있다. 슬픔은 상황을 검토하고 진정시키는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분노는 신중을 잃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감정이 슬픔이라는 정류장을 거쳐 역동적인 분노로 작동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슬픔을 두려워한 나머지 버스는 정류장을 지나쳐 버린다. 사람들은 왜 슬픔을 두려워할까?
*눈물을 흘리자
슬픔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온갖 고통에 의한 감정 소모 때문이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부정적 감정을 구석으로 밀어내는 것이 건강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억지로 부정적 감정을 잊고 극복해 나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제쳐 두기보다는 건강하게 해소를 해야 한다. 건강한 해소법 중 하나로 눈물이 있다. 미국의 생화학자 윌리엄 프레이 박사는 기쁠 때나 슬플 때 흘리는 눈물에는 카테콜아민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카테콜아민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속에서 대량으로 생성되는 호르몬으로 축적될 시 다양한 질병을 일으킨다. 눈물을 통해 게워내다 보면 감정은 세척되어 슬픔이 우울증이나 분노로 이어지지 않게 해준다.
눈물을 흘리는 것. 언제부턴가 우는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우리 자신들은 그러한 시선을 내면화하여 온갖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도 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어떻게 보면 슬픔 그 자체를 인지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우는 것은 감정에 충실한 행동이다. 감정을 피하지 말고 감정에 충실하자.
*슬픔과 대치
사별, 이별, 사고 등 예측할 수 없는 범주 밖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 나아가서 사람들은 슬픔과 대치했을 때 오히려 당황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이것은 슬픔을 대하는 연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 속 모든 순간에서 사소하게라도 감정을 대하는 연습이 있어야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다가왔을 때 슬픔에 조금이나마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슬픔이 다가왔을 때, 부인하지 않고 마주한 다음에 해야 할 것은 가슴속 응어리들을 외부에 말로 표출하는 것이다.
*말
슬픔의 파도에 빠졌을 때는 ‘말’을 통해 게워내야 한다. 가슴속으로 혼자 자신에게 말을 걸고 최면을 걸며 자신을 오로지 긍정적으로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외부로 표출하고 토로해라. 반드시 상대방을 두고 말을 하는 게 아니더라도 괜찮다. 혼자 샤워하던 도중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감정을 바깥으로 외쳐야 한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말은 병든 마음을 고치는 의사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글로 해소해도 좋다. 말문이 막힐 때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는 사항들을 글로 적어내려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다 보면 쌓여 있던 슬픔이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러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맥베스Macbeth> 4막 3장, 던컨 왕의 아들 맬컴의 대사)
영화 <인사이드아웃>의 초반부에 슬픔이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라일리가 집에 돌아오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슬픔이었다. 슬픔은 그 어떤 감정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힘을 발휘한다. 슬픔을 배척하고 회피하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슬픔은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슬픔에는 그저 공감해 주어야 한다. 마음껏 슬픔에 흐느끼도록,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슬픔이라는 감정을 쓰다듬어 주며 따스하게 폭 안아주자.